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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고개(용산) 순교성지


  • 당고개 순교성지는 한국에서 세 번째로 많은 순교성인을 배출한 순교성지로, 기해박해가 끝날 무렵 1839년 열 명의 남녀 교우들이 장렬히 순교한 곳이다. 이들은 본래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처형되기로 되었으나 서소문 밖 상인들이 설 대목장을 보아야 함으로 형장을 다른 곳으로 옮겨 줄 것을 요청하였기 때문에 이 곳 당고개로 옮겨 사형을 집행함으로써 순교자들을 모시게 되었다.
    당고개 순교성지의 성인들은 서로 간에, 혹은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하신 성인과 가족 관계이신 분들이 많았는데, 부부 관계로는 성 박종원 아우구스티노와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인 성 고순이 바르바라, 성 손소벽 막달레나와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하신 성 최창흡 베드로, 그리고 그분들의 딸 성 최영이 바르바라와 역시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하신 성 조신철 가롤로가 있다.
    성 홍병주 베드로와 성 홍영주 바오로는 형제로 당고개에서 함께 순교하였다. 성 이인덕 마리아와 옥중 순교자 성 이영덕 막달레나 역시 자매이다. 당고개 순교성인 아홉 분은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이성례 마리아는 203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순교자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아내이며, 한국 천주교회 두 번째 사제이자 땀의 순교자로 불리는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어머니인 복녀 이성례 마리아는 수많은 고문과 회유 속에서 한때 옥에서 굶어 죽어가는 젖먹이와 옥 밖의 어린 네 자식의 미래를 생각하며 흔들렸지만, 다시 체포되었을 때는 먼저 순교하신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아들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의지하며 용감히 배교를 취소하고 끝내 순교함으로써 인간적인 갈등과 그를 넘어서는, 주님이 함께 하시는 모성애를 통해 성가정과 순교의 영광을 더 크게 드러냈다.
    당고개 순교성지는 ‘찔레꽃 아픔 매화꽃 향기’를 주제로, 박해의 고통을 찔레꽃 가시로, 하느님의 은총을 매화꽃 향기로 표현하여 조성되었다. 당고개 성지의 십자가의 길 14처는 복녀 이성례 마리아가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구성으로 이루어져 고난의 길과 순교의 영광을 함께 느낄 수 있게 했다. 인간이 삶을 살아가며 겪는 풍파에서 든든한 힘이 되어주는 가족과 신앙의 중요성을 느낄 수 있는 당고개 순교성지는 어머니의 성지, 생명의 성지로 불리며, 어머니가 자식을 품에 안듯이 순례자들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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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혼의 탯줄을 이으신
  • 손소벽막달레나.png손소벽 막달레나 성녀는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순교하신 손경윤 제르바시오의 딸로서 자신보다 한 달 먼저 순교하신 최창흡 베드로의 아내이다. 그리고 성녀보다 하루 뒤에 같은 형장에서 순교하신 최영이 바르바라의 어머니이며, 조신철 카롤로는 성녀의 사위로서 최 바르바라의 남편이다.

    성녀가 태어나던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많은 교우들과 교회의 지도자들이 순교하거나 유배형을 당하였고, 교회는 지도자 없이 뿔뿔이 흩어져 회생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 절망적이 상황이었다. 살아남은 교우들은 부녀자들이나 어린아이들이고, 남자들은 글조차 읽을 수 없는 사람들 뿐이었다. 성녀 역시 할머니와 함께 가난과 박해에 대한 두려움으로 숨을 죽이며 살아야만 했었다.
    세월이 지나 성녀는 교우들과 접촉하기 시작하였고, 교리를 배워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고, 17세 되던 해에는 최창흡 베드로과 혼인을 하였다.  남편 성 최창흡 베드로는 조선 초대 총회장이면서 성덕이 뛰어났던 최창현 요한의 동생으로 회장직분을 수행하다가 성녀와 함께 체포되어 성녀보다 한 달 앞서 서소문 형장에서 순교의 영광을 받으셨다.
    성녀는 11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자신과 더불어 옥중 생활을 하다가 순교한 맏딸 최영이 바르바라 성녀와 옥중까지 데려갔다가 친척의 손에 넘겨 거두어 주기를 부탁한 두 살짜리 막내 딸 막달레나 만이 살고 다른 자녀들은 일찍 하느님 품으로 보내는 아픔을 겪었다. 성녀는 기해박해가 일자 남편과 함께 사위 조신철 가롤로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그해 7월 일가족 모두 체포되어 문초를 당하고 옥중고초를 겪게 되었다. 사위 조신철이 9월26일에 순교하면서 차례로 순교자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성녀의 남편 최 베드로는 형장으로 향하기 전에 부인에게 전해 달라는 쪽지를 옥리에게 부탁하였다. 그 내용은 “눈물과 고통은 육정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순교하게 됨을 주님께 감사하고 찬미하면서 나의 뒤를 따르기 바란다. 천국에서 만납시다.”였다.
    성녀는 일곱 차례에 걸쳐 심한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성녀의 마음을 바꾸게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배교를 강요하는 포도대장의 호통에 오히려 “제 목숨은 제 것이 아니고 그것을 제게 주신 천주의 것이니 그분만이 아무 때라도 그것을 도로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 삶과 죽음을 주재하시는 천주를 위해서 죽어야 한다면 죽겠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라고 답하여 온전히 생명의 주관자이신 주님께 신뢰하는 용덕을 드러내었다. 또한 문초로 인한 상처와 이와 벼룩 등으로 견디기 어려운 옥중 생활에 대하여도 “만일 천주께서 나를 도와주시지 않으면 내 힘만 가지고는 다만 일각이라도 벼룩이나 이가 나를 뜯어먹는 것을 참아 견딜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천주께서는 참아 받을 힘을 내게 주십니다.”라는 말로 인내의 덕을 발휘하였다. 그리고 옥중에 데려온 두 살짜리 어린 딸에 대한 모성에 호소하여 자식을 살리고 자신의 생명도 보존하라는 회유에 “주께서는 생사의 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나의 생명은 천주께 달렸습니다. 그분을 거역하면서까지 내 생명을 보존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천주님을 위해 죽으면 천주께서 내 딸을 돌보아 주실 것입니다.”하면서 오히려 하느님께 감사드렸을 뿐만 아니라 모정의 유혹으로 신앙을 잃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막내딸을 친척의 손에 맡겼다.
    형조로 이송되어 역시 배교와 동료 교우들을 발고하라는 문초를 당하였으나 변함없는 용기로 극심한 형고를 이겨내었다. 마침내 12월 11일 형조에서 성녀 손소벽 막달레나는 온 몸이 사학에 젖었고 온 집안이 이에 감화되었으며 결코 배교하지 않고 죽기를 원하므로 일각이라도 용서할 수 없기에 결안하여 시행하겠노라는 보고를 하였고, 19일 결안이 내려 12월 27(양력 1840년 1월 31일) 여섯 명의 동료 교우들과 함께 당고개에서 참수 치명하여 순교자의 반열에 들었다.
    당시 성녀의 나이는 39세였으며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서 성인 반열에 올라 공경 받고 있다.

  1. - : 하느님의 종

    이성례 마리아 (1801 ~ 1839)

  2. - : 영혼의 조력자

    박종원 아우구스티노 (1792 ~ 1839)

  3. - : 영혼의 탯줄을 이으신

    손소벽 막달레나 (1801 ~ 1839)

  4. - : 성직자의 영원한 벗

    이문우 요한 (1809 ~ 1839)

  5. - : 원앙을타고 천상에오른 성녀

    최영이 바르바라 (1818 ~ 1839)

  6. - : 한국의 마리아 막달레나

    권진이 아가다 (1819 ~ 1839)

  7. - : 꺼지지 않은 영혼의 반딧불

    이경이 아가다 (1813 ~ 1839)

  8. - : 형제가 함께 성인이 된

    홍영주 바오로 (1801 ~ 1839)

  9. - : 천국으로 조기 유학을 떠난

    홍병주 베드로 (1798 ~ 1839)

  10. - : 신앙의 마중물

    이인덕 마리아 (1818 ~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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